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머스 에디슨 (문단 편집) ==== 그래도 인정받는 업적 ==== 재평가 유행에 따라 에디슨이 많이 까이고 있고, 비판할 점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과 공학에 대한 오해와 현대시점의 렌즈를 사용한 평가로 인해 과장이 심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특히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에디슨의 나쁜 업적을 과장하면서 '''희대의 [[인간말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에디슨을 절대 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었다. 다만, 이미 90년대에도 한국에서 여러 서적으로 에디슨이 인간말종이라고 서술된 역사 다시 돌아보기 책자들이 여럿 나왔었다. 에디슨이 최초의 전구를 발명하지 않은 건 사실이나, 에디슨이 최초의 '상용화된' 전구를 개발한 것에 대해서까지 평가절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도 조지프 스완을 포함해 전구 개발에 힘쓴 많은 발명가들은 에디슨의 기발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S 상술했듯, 에디슨은 스완의 아이디어를 훔치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상용화하지 못해서 도용한 아이디어에 자신이 직접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아이디어를 짜서 살을 붙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빼앗긴 피해자조차 본인도 못한 상용화를 보란 듯이 성공한 에디슨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개발해 왔지만 뭔가 시원치 않던 전구를 더욱 밝고 오래 켜지도록 개량하고 실용화시킨 업적 덕분이다. 괜히 그에게 "먼로 파크의 '''[[마법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즉, 에디슨이 전구 개발사에 업적을 남긴 것은 전구의 발명이 아니라, '''전구를 모두가 쓸 수 있도록 [[개량]]하고 [[인프라|상용화를 가능하게 하는 회사와 유통 시스템까지 정립]]했다는 점'''이다. 전구만 발전시킨게 아니라 개량된 [[발전기]]과 [[배전반]], [[송전선]], [[변압기]], [[소켓]], [[스위치]], 안전[[퓨즈]], 적산전력계([[계량기]]) 등 전기사용과 관련되는 주변기기까지도 같이 창조해냄으로써 전기문명 시대를 연 것이다. 발전기든지 전동기든지 하는 것들을 달랑 하나나 둘 정도만 만들고 끝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즉, 종합하자면 세계 최초의 기업연구소를 설립하면서 기업에서 연구하는 방법을 만들어서 현대 기업의 연구개발 과정의 기틀을 닦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모든 기계나 물건은 절대로 한 사람의 머리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타인이나 전 세대가 발달시킨 이론이나 아이디어, 기존의 발명품에 자신의 지식과 노력을 접목시키는 과정이 거듭되어 탄생하는 것이다. [[니콜라 테슬라]]의 [[교류(전기)|AC]]도 [[마이클 패러데이]]가 이론을 발전시켰고 이폴리트 픽시는 실제로 교류 [[발전기]]를 만들었다. 테슬라가 AC를 더욱 실용적으로 발전시킨 건 사실이지만, 상용화시킨건 [[웨스팅하우스]]다. 혁신이란 것은 결국 사회적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과정이다. 그러니 테슬라든 에디슨이든 최초가 아니고 타인의 업적을 참고했다는 이유만으로는 비판할 수 없다. 에디슨이 자신의 직원들이 이룬 것에 자신의 이름만 걸고 특허를 냈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 많은데, 에디슨이라고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동안 놀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분명하게 연구의 방향을 제시했고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니 절대로 날로 먹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뺏겼던' 직원들도 에디슨 사후에까지 그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았으니, 에디슨을 단순히 냉혈한 사업가라고 일축하기는 힘들다. 그 이미지에 반하는 또 하나의 예시를 들자면 에디슨이 [[X선]]을 가지고 실험을 했을 때, 당시 방사능에 대한 무지로 인해 X선 실험을 담당하고 있었던 클라렌스 달리와 함께 엄청난 [[피폭]]을 당했다. 달리는 결국 [[방사능]]으로 인해 고통스럽게 죽었지만, 에디슨은 불구가 된 달리에게 필요한 돈을 모두 지불했고, 과부가 된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개인적으로 금전적 지원을 해줬다. 이게 '''20세기 초반'''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노동자 배상금 따위는 없었던 당시 책임이 없다며 달리를 길로 내쫓았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이 실험 덕분에 X선을 사용하는 형광투시경이 상용화되었지만, 에디슨은 이 일을 계기로 더 이상의 X선 연구를 포기했고 X선의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을 말로 남겼다. [[알쓸신잡]]에서 에디슨빠를 자처한 [[정재승]]이 이 점에 대해 옹호했는데, 당시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나 보상이 희박했으며, 특허권에 대한 대기업들의 침해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개인 개발자나 중소업체의 특허를 맘대로 침해하고 복제품을 내놓고는 소송이 걸리면 자본을 앞세워 시간을 장기간 끌어가며 결국 원 특허권자가 재산만 날리고 특허는 포기하게 만드는 일도 흔했다.[* 현재도 이루어지는 일이다. 최근 미국에서도 선발명주의의 단점과 선출원주의의 확실한 장점을 인지하여 변경되었다. 다만, 미국은 최근에서야 선출원주의로 변경시켰으나, 에디슨이 살고 있는 당시에는 선 발명 우선주의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다. 늦게 출원해도 연구 노트라든지 녹취록, 녹음 등 먼저 발명하였다는 증거가 있으면 인정된다. 선 출원은 꼼짝없지만, 개발 증거는 조작되고 훼손될 수 있다. 상기한 에디슨이 연구 노트를 찢어버린게 그런 짓이다. 비슷한 분야인 디자인 권리 쪽에서도 기업의 횡포는 여전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에디슨은 직원들의 특허를 회사의 이름으로 낸 뒤 직원에게는 해당 특허개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하고, 해당 특허를 다른 기업이 침해할 경우 회사 차원에서 상대하는 식으로 특허를 보호한 거라고 했는데, 이는 현재의 대기업들도 애용하는 방식이다.[* 일부 대기업의 얘기다. 그나마 대부분 충분치 않으며, 작은 회사는 직무발명 보상 같은 게 없거나 있어도 제대로 해 주는 곳이 드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